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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갑상선암---이은정(46세, 주부)오늘밤 이곳에 함께있는의 최고의 날이었으면 합미다

작성자
힘찬이
작성일
2016.10.28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99
내용

갑상선암


이은정(46세, 주부)

지금 내 나이는 46세이다. 나는 20년 전인 스물여섯 살 때 갑상선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했는데 한 번 병에 걸리면 잘 낫지 않아 무척 고생했다.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늘 잔병을 몸에 안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갑상선 이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니 눈앞이 아득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을 생각하니 더욱더 갑갑했다. 나는 몇 개월을 그냥 버티다가 엑스레이 비용을 준비해 부산대학병원에 갔다. 진단을 해본 뒤 의사 선생님이 수술을 하면 나을 수 있지만 아직 미혼이니 약으로 치료해 보자고 하셨다. 수술을 할 경우 아이를 낳는데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지로이겐이라는 약을 약국에서 사먹으라며 처방전을 주셨다. 나는 처방전대로 지로이겐을 약방에서 구입해 하루 한 알씩 먹었다.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심하게 설사를 했다. 반으로 약을 줄여도 설사는 멎지 않았다. 나흘이 지나자 도저히 약을 먹을 수 없어 끊어버렸다.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숨이 막혀 곧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나는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저를 데려가시는 것은 마음대로 하시되, 제발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저를 불러가소서." 시간이 흐르자 숨가쁜 증상이 씻은 듯 사라지고 고르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후 나는 숨이 막힐 때면 한약, 양약을 조금씩 먹으며 버텨왔다. 그러나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않아 갈수록 몸이 약해지고 10분 이상을 걸을 수가 없었다. 5분쯤 걷다가 쉬고, 가다가 또 쉬어야 했다.

견디다 못한 나는 77년 서울 한양대학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즉시 수술을 하라고 했다. 수술비용은 극빈자 카드를 이용해도 1백5십만 원이었다. 당시 우리 형편으론 상상할 수도 없는 큰 돈이었다. 그런데 갑상선 수술은 재발률이 높았다. 수술을 받아도 3분의 2 정도는 재발해 다시 병원에 온다는 것이었다. 수술 후 재발한 환자들이 내게 간곡히 말했다. 수술받지 말라고. 아무 소용없다고. 3분의 2가 재발해 병원에 온다지만 실제로는 99퍼센트 재발한다고.

나는 수술을 포기하고 집으로 내려갔다. 엄청난 돈을 들여 수술한 뒤 재발하느니 그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게 낫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압, 수지침, 부황 등을 하며 급한 순간들을 넘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1987년, 나는 장두석 선생님과의 소중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이젠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호흡이 곤란했고 기운도 없었다. 물조차 넘기기 어려웠고 목소리마저 변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 우유를 먹으면 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방송을 듣고 우유를 마셔보았으나 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 요구르트로 바꾸어 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군가 생수가 좋다는 이야기를 해 생수를 조금씩 마셨다. 다행히 생수는 거부반응 없이 넘어갔다. 생수라도 넘길 수 있게 되니 몸에 조금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증상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나는 다시 부산대학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내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셨다. "지금은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와 아무 일도 못하고 병마에 시달리다 이렇듯 허무하게 죽어가야 하는가.

나는 그해 부활절, 거제 신현성당에 머물고 계신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이것 봐라!" 하며 다리를 내보이셨다. 어머니의 맨다리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 어머니는 긴 내의를 사시사철 입어야 하실 정도로 몸이 찼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 안 추우세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전혀 춥지 않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게 차근차근 자연건강법에 대해, 장두석 선생님에 대해 말해 주셨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니 어머니는 잡곡밥에 채소와 김치, 김이 고작인 식탁을 차리셨다. 신부님은 잡곡밥을 드시고 어머니는 현미 오곡가루를 드셨다. 나도 함께 잡곡밥을 먹는데 처음엔 이상했으나 꼭꼭 씹어 먹으니 한결 맛이 나았다.

나는 그해 6월 18일 어머니, 신부님과 함께 장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선생님은 촉수를 한 뒤 몇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내가 중병은 중병이구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진찰을 하신 후 어머니와 신부님은 먼저 가시고 나는 3일 정도 장 선생님 댁에 머물기로 했다. 두번째 되던 날, 냉온욕을 마치고 나올 때 나는 목에서 돌멩이 같은 것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숨구멍이 트인 듯 시원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쩐지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흘 동안 장 선생님 댁에 머물고 난 뒤, 마지막 날 아침 촉수를 하신 선생님은 역시 아무 말 없으셨다. 나는 뭔가 한마디 해주길 기다리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한참 뒤에 선생님은 "하루에 풍욕 11번 이상 하고, 열심히 해보라."고만 하셨다.

나는 집에 돌아온 뒤 아침은 반드시 단식을 하고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며 생채식을 실천했다. 풍욕도 열심히 하고, 냉온욕도 거르지 않고 실행했다. 허기가 지고 배가 고팠다. 그러나 어쩐지 몸이 가볍고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정 허기져 참을 수 없을 때에는 멸치를 한두 마리 씹어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붕어운동, 모관운동, 합장합척운동, 등배운동을 했다. 운동을 하고 나면 어느덧 허기는 사라지고 기운이 솟았다. 그와 함께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단식을 하고 된장찜질을 했으며 무염일은 철저히 지켰다.

하루에 풍욕을 4∼6회 하고, 남들은 세 끼 먹는데 한 끼 먹고, 그것도 현미 오곡가루 두 숟가락에 채소가 고작이니 몸이 급속도로 말라갔다. 내가 살이 자꾸 빠지니까 사람들은 내가 죽는다고 난리였다. 밥도 먹고, 고기도 먹어야 기운이 난다고 걱정들이 대단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이야 뭐라 하든 나는 기분이 좋고 아픈 데도 없으며 오히려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하고 나니 57.5킬로그램이던 몸무게가 46.5킬로그램으로 빠져 있었다.

나는 1년 넘게 생식을 하다가 잡곡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밥을 먹기 시작하니 문제가 생겼다. 과식을 하게 된 것이다. 어느덧 몸무게가 54킬로그램까지 올랐다. 갑자기 몸이 불어나자 손 마디부터 무릎 관절까지 뼈 마디마디가 퉁퉁 부어올랐다. 다시 갑상선이 부어올라 호흡이 곤란해졌다. 정말 몸은 일푼어치도 양보가 없었다. 내가 잘못된 생활을 하자 곧 몸이 안 좋아진 것이었다.

나는 그 시점에서 건강이 회복된 후의 내 생활을 돌아보았다. 가만 돌이켜 생각하니 내가 너무 과식을 하고 있었다. 또 익힌 것을 너무 많이 먹고 채소를 적게 먹었다. 게다가 풍욕도, 6대 법칙도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단식을 시작했다. 10일 동안 단식을 하는데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생수를 마시고, 마그밀을 먹으며 된장찜질을 3회 정도 한 뒤 관장을 하니 몸에 있는 모든 오물이 빠져나오는 듯이 시원하고 기운이 났다. 그즈음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내가 처음에 장 선생님에게 촉수를 받고 난 뒤 선생님이 아무 말 안하신 이유를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내 몸의 종양(암)이 너무 커서 장 선생님조차도 2∼3개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주위 분들께 말하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종양이 움직이면 사는데, 양쪽 목 안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도저히 살 수 없다고까지 하셨다니, 정말 내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무 말 안하시고 그저 "열심히 해, 열심히 해."라고만 되풀이하셨던 것이었다.

나는 요즈음도 생채식과 풍욕, 냉온욕, 6대 법칙을 열심히 지키고 10일, 7일, 3일 단식을 번갈아 하며 재생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요법 자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채식을 하고 굶기를 밥먹듯 하는 동안 나는 내 몸의 독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함께 내 안에 있는 모든 욕심이 연기로 화해 사라지는 것도 느꼈다. 그리고 내가 병을 얻게 된 것은 잘못된 생활, 무엇보다 이기적이며 욕심에 가득 찬 생활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정성껏 도와주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더할 수 없이 소중하고 복되게 느껴진다.

나는 남의 집에 가면 냉장고를 뒤져 조미료며, 흰설탕 같은 것이 있으면 주저 않고 쓰레기통에 넣어버린다. 그래서 처음에 사람들은 나를 화성인 바라보듯 한다. 그러나 내가 취지를 잘 설명하면 다 이해하고 따라와 준다. 모두들 자연건강법을 알게 되어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의학적 소견

이은정 씨의 경우 목 종양으로 숨도 못 쉬고 물조차 넘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를 찾아왔다. 목이 퉁퉁 부어 얼굴 넓이와 같았다. 잘 아는 신부님께서 동정녀이니 잘 부탁한다고 해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게 했다.

그는 수건으로 목을 꽁꽁 매고 있었다. 그러니 목의 혈액순환이 안되어 점점 종양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건부터 풀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은 자리에 마고약부터 발라주었다. 우리 집에 머무는 사이 목에서 고름이 마구 터져나왔다.

그는 4∼5일 집에 머물며 교육을 받고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를 잊으려고 애썼다. 솔직히 말하여 그의 죽음 소식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그가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1년 동안 단식을 했으며 지금껏 생식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과 소금, 감잎차 이외엔 별로 먹는 것이 없다. 하루에 한 끼 먹으면 많이 먹는 것이라 했다. 그 역시 스스로를 치유한 뒤 많은 환우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단식》, 정신세계사, pp.272-278

http://cafe.daum.net/naturalecology/Z5FS/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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